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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이야기

고대 로마의 문화 아이콘 ’콜로세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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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의 역사4]

로마 하면 콜로세움(Colosseo)’ 원형경기장과 벤허영화가 떠오른다. 이 영화의 감동으로 필자는 로마여행을 떠났던 적이 있었다. 그때 여행지에서 만나 로마는 아무렇게나 버려진 듯한 돌덩어리 하나에도 깊은 역사적 증거가 담겨 있어 그 자체로 거대한 유적지였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기원전 8~4세기에 로마인들이 지배했던 도시 로마의 발전과 로마 미술은 깊은 관련이 있다는 것이다. 인간 중심적인 그리스에는 없던 풍경화와 정물화라고 하는 새로운 장르가 이 시대에 탄생했다. 또한 헬레니즘 회화로서 육성된 로마 시대의 회화는 건축 공간의 충실에 새로운 발전을 가져왔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건물 외부에 조각해서 아름다움을 강조했다면, 고대 로마인들은 건물의 웅장함을 강조하고 실용적이면서 시민을 위압하는 커다란 공공 건축물을 건설하였다. 그 예로 매몰된 폼페이와 헤르쿨라네움에 남아 있는 벽화와 로마의 문화를 느끼는 콜로세움에서 알 수 있다.


오늘은 고대 로마의 문화 아이콘인 콜로세움에 대해 좀 더 알아보자.

콜로세움은 고대 로마 시대의 원형 경기장이다. 콜로세움(Colosseo)의 어원은 이탈리아어 콜로살레(Colossale)에서 유래한 '거대하다'라는 뜻으로, 그 당시에 건립된 건축물 가운데 최대의 건축물이었다. 이곳은 70년 베스파시아누스 황제가 착공해 10년 뒤 그의 아들인 티투스 황제가 완공했다. 베스파시아누스는 평민 출신 황제로서, 네로황제의 폭군 정치에 대비되는 서민 이미지를 주려고 네로 황제의 황금 궁전(도무스 아우레스)의 정원에 있던 인공 호수를 메운 자리에 세워졌다. 콜로세움에서 열린 검투 경기는 고대 로마 시대의 오락경기로서, 죽을 때까지 싸우는 것은 아니었다. 검투사 한쪽이 상처를 입었을 때는 관중들이 중단을 시키거나 심판의 판단으로 결정했다. 검투사가 죽으면 가족에게 많은 보상이 주어지기 때문에 보통 죽음까지 가는 경기는 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 건물구조는 석재와 콘크리트로 이루어졌으며 객석의 배치는 고대 로마의 신분에 따라 지정되었다. 내부 관람석은 경사가 있어 내부를 관람하기 쉽게 되어 있다. 76개의 출입구가 있으나 동선을 정교하게 설계해 정원 5만 명이 입장하는 데 30분밖에 걸리지 않았다고 한다. 1층은 높이 10.5m 도리아식 반원주, 2층은 높이 11.85m 이오니아식 기둥, 3층은 11.6m 코린트식 기둥으로 되어 있고, 4층은 관중들이 작렬하는 햇빛을 피할 수 있게 벨라리움이라는 천막을 고정하기 위한 장대 장치를 지탱하는 240여 개의 기둥으로 되어 있다.

콜로세움 등과 같은 로마 시대의 건축물들을 통해 당시의 시대상과 생활상, 과학기술의 수준을 알 수 있으며, 안락한 생활을 열망했던 고대 로마인들은 실용성을 강조하여 현실적이며 기능적인 건축과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성격을 띤 공공 건축을 중심으로 많은 업적을 남겼다. 특히 시멘트와 아치를 사용하여 건물을 더 높이 짓고 성문이나 교각과 수로를 더 넓게 건축되었다. 이러한 건축의 발달은 오늘날까지 이어져 웅대한 내부공간에 돔 천장을 세울 수 있게 된 것이다.
콜로세움(Colosseum) ,70~80 AD, 이탈리아 로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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